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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보경심 4황자 옹정제의 잠저 '옹화궁'

Eden Choi 2012. 4. 18. 07:29

 

YONGHE TEMPLE

 

옹화궁 雍和宮

 

 

보보경심 4황자 윤진(오기륭)

 

강희제를 이어 옹정제(雍正帝)가 되는 4황자 윤진

그 윤진이 황자시절 거처하던 곳이 바로 이곳 옹화궁이다.

 

 

옹화궁은 1694년에 완공되었는데 본래 환관의 수장인 대내총관(大內摠管)의 자택이었다.

 그러나 당시 황제인 강희제는 자신의 넷째 아들인 윤진(옹정제)에게 하사하였고,

 윤진이 옹친왕이 됨에 따라 옹친왕부(雍親王府)로 불렸다.

1722년 윤진이 옹정제로 즉위하자, 옹정제는 옹친왕부를 옹화궁으로 개명하고 반은 라마교 사원, 반은 행궁으로 만들었다.

그 아들인 건륭제 때에는 황실을 상징하는 금색 기와로 칠하고 행궁 부분도 모두 헐어 황실 전용 라마교 사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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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화궁

 

 베이징 시내에서 옹화궁 찾아가는 방법

버스는 6, 13, 18, 62, 116, 807번 등을 타고 옹화궁에 하차하면 된다.

하지만 말이 안통하는 북경에서 버스타는게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니

주로 지하철을 이용하게 되는데, 다행히 지하철 옹화궁역이 있으므로 거기서 하차하면 된다.

다만, 지하철역을 나오면 위 지도의 제일 윗쪽(A표시) 만복각쪽으로 나오게 되는데

옹화궁의 입구는 지도 제일 아래쪽까지 내려와야 한다.

 

지하철역을 나오면 상점이 즐비한 거리를 찾으면 되는데

헷갈리면 옹화궁 담벼락만 따라간다.

 

 

 

 

그리고 여기가 보이고 좀더 지나가면 옹화궁의 입구가 보일 것이다.

 

 

여기가 옹화궁의 입구

 

 

옹화궁 패루(牌樓)

 

자..이제 표를 구입하고 옹화궁 본격적인 옹화궁 관람

입장료가 25원인데, 조그만 CD로 해서 준다.

역시나 여기서도 국제학생증은 사용불가

베이징 내에서는 외국인 여행객이 많아서 그런지 국제학생증이 거의 통용이 안된다. 아쉽구로..

 

 

 

 

 

역시 중국이다.

황자 시절 머물던 곳임에도 이렇게 넓다.

 

 

 

옹화궁의 정문인 소태문(昭泰門)

 

 

 

 

 

포대화상(布袋和尙)

 

배불뚝이 모습을 한 이 불상은

9세기 말 현존했던 스님을 모델로 했다고 하는데,

큰 포대에 온갖 필요한 일용품들을 넣고 다녀서 포대화상, 한마디로 자루스님

금복주에서 많이 봤는데..ㅋ

 

 

 

 

동정(銅鼎)


청동향로인데 동전 던지지 말라고 해도 안에 보면 동전 가득..

좀 가져가면 안될까?ㅋ

 

 

옹화궁雍和宮

 

청나라 글자인 만주어와 한자, 티벳어, 몽골어 4가지로 현판에 적혀있다.

 

 

옹화궁은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청나라 옹정제가 황자시절 머물렀던 사저이자, 그의 아들 건륭제가 태어난 곳으로서

옹정제가 황제에 오르면서 옹친왕부에서 옹화궁이 되었고,

건륭제에 이르러  라마교를 신봉하는 티벳과 몽골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티벳불교인 라마교 사원으로 바뀌게 된다.

여하튼,

2명의 황제를 배출한 이곳은 황제의 거처에만 사용되는 붉은 벽과 황색 기와로 되어있다.

 

 

 


강희제의 유조와 정변

 

 

 강희제의 전위조서


 1722년(강희 61년) 12월 초, 강희제는 병이 들어 북경의 이궁인 창춘원(暢春園)에 있었다. 이때 강희제는 모든 백성들과 대신들이 쇠약하진 자신을 보면 자신의 병세를 눈치챌까 두려워 모든 대신들의 출입을 통제시키고 황자들 역시 자신의 허락 없이는 창춘원에 들어오지 말라 명하였다. 그 당시에 대신들 중 유일하게 출입이 가능했던 자는 윤진의 심복 중 심복인 구문제독 겸 보군통령 융과다와 영시위내대신 장정옥(張廷玉)이었다. 공식 기록인 《청사고》(淸史稿) 〈성조인황제실록〉에 따르면 1722년(강희 61년) 12월 20일 강희제는 3남 성친왕 윤지, 7남 윤우, 8남 윤사, 9남 윤당, 10남 윤아, 12남 윤도, 13남 윤상 등 7명의 황자들과 대신들을 불러 모았고 후계자로 4황자 윤진을 지명한 후 붕어하였다. 당시 강희제의 전위 조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 제4황자 옹친왕 윤진은 인품이 귀중하고 사려가 깊으니 짐이 생각하건대 필히 대통을 이을 자격을 갖추었다. 고로 짐의 뒤를 이어 즉시 황제의 자리를 잇도록 하고 예법에 따라 상복을 입다가 27일에 평복으로 갈아입고 새 황제의 즉위를 만천하에 알려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알게 하라.”


당시 후계자로 4황자 옹친왕 윤진과 14황자 순군왕 윤제 중 고심하던 강희제는 성격이 치밀하고 신중하여 황위를 물려받을 수 있는 재목이라 여기고 윤진에게 넘긴 것이다. 그러나 강희제의 죽음과 후계자로 윤진을 지목한 것에 대해 많은 가설들이 있다. 역시 아버지를 죽이고 황제에 올랐다는 수 양제는 부황인 수 문제를 시해하였다는 증거가 정사인 《수서》와 《자치통감》에 상세히 나와 있어서 그가 부황을 죽이고 황위에 올랐다는 것이 정사와 야사 모두 일치하나, 야사에서 주장하는 윤진의 강희제 시해는 청나라 정사인 《청사고》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 특히 야사에서는 그 당시 강희제의 침전을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던 융과다는 윤진을 황위에 올리기 위해 강희제의 유조를 변조하고 강희제를 시해했다는 가설이 있으나, 증거가 불충분하다. 또는 윤진이 직접 강희제를 죽였다 하나 이 역시 증거가 불충분하다.


그러나 분명 강희제의 붕어와 윤진의 즉위에 대해서는 여러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대개 다음 황위를 한 황자에게 넘겨주면 조정이나 군을 장관하는 황자에게 넘겨주었어야 하는데 윤진은 강희제 붕어 당시 아무런 군사적 권한이 없었다. 또한 가장 총애 받던 14남 윤제는 무원대장군의 작위를 받아 막강한 군권을 손에 넣었기 때문에 강희제의 진정한 후계자는 윤진이 아닌 윤제라는 소문이 널리 퍼지기도 하였다. 이 소문을 뒷받침하는 가장 유명한 설은 바로 강희제의 유조가 융과다에 의해

 

 

‘14황자 윤제에게 물려준다.’(傳位十四皇子)에서 ‘4황자 윤진에게 물려준다.’(傳位于四皇子)로 고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설에도 약간의 황당한 점은 있다. 당시 ‘어조사 우’(于) 자가 널리 쓰이지 않았고 황실 문서에서는 ‘어조사 어’(於) 자만이 쓰였다는 점과 유조같이 중요한 공식 황실 문서에서는 만주 문자와 한자를 다 써야 하나, 이 유조는 한자로만 쓰였다는 점, 황자들에게는 반드시 태어난 순서에 따라 그 앞에 황(皇) 자를 붙여 써서 만약에 윤진에게 넘겨준다 하였으면 황사자(皇四子)로 표기했어야 하나 이렇게 표기하지 않고 사황자(四皇子)로 표기하였다는 점이다. 또한 윤진이 즉위하자 은근히 윤제만을 편애하던 윤진의 모비 덕비 오아씨도 윤진이 아버지를 시해하고 황제에 오르자 윤진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1723년(옹정 원년) 초에 목을 매 자살하였다고도 한다. 그리고 당시 북경 내성의 9개 성문은 당시 내성을 통괄하던 융과다의 명으로 강희제의 사망일인 12월 20일을 기준으로 6일 동안 굳게 닫혀 있었다 한다.
또한 윤진이 즉위하게 된 것은 재빨리 정국을 이용하여 즉위하게 된 것이라 한다. 윤진이 비록 부황의 총애를 받았으나 후계자까지는 아니었고 야심이 컸던 윤진이 군사들을 이용하여 부황과 형제들을 살육 또는 감금하여 황제에 올랐다는 설 역시 존재한다. 일부 사람들은 강희제는 결코 황위 계승의 유조를 남기지 않고 후대 사람이 조작하였다라고 주장하지만 어쨌든 윤진이 강희제의 유조로 인하여 즉위하였으므로 더 이상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내용출처 : 위키피디아

 


 

 

 

보보경심에서 14황자역을 맡은 임경신

 

강희제의 총애를 받았던 14황자

야사가 맞다면 그가 강희제를 이어 황위에 올랐을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이 때문에 동복형인 4황자가 황제가 되었음에도 친형인 옹정제에 의해

모든 작위를 삭탈당하고 강희제의 무덤을 지키는 능지기로 남은 여생을 살아가게 된다.

 

아..개인적으로 보보경심 보면서 14황자가 제일 괜찮던데..

약희 이것이 너무 남자를 많이 잰다. ㅋ

 

 

강희제의 경릉 바로가기

http://blog.daum.net/mickeyeden/16155568

 

 

 

라마교 Tibetan Buddhism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중앙아시아와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으로 전파되었으며

당나라 문성공주가 티벳으로 시집가면서 중국불교

그리고 티벳의 민속신앙인 본교

티벳의 국왕이 불교에 기반한 통치를 위해 인도로부터 직접 수입한 후기 대승불교 등이 통합된 것으로

스승인 라마(Lama)를 중시하여 라마교라고도 불린다.

 

또한 원나라의 지배하에서 오히려 종교적 영향을 미쳐 티벳불교는 원나라의 국교가 되었기 때문에

현재 티벳불교는 몽골과 티벳, 인도북부와 히말라야산맥의 국가들에서 주로 신봉되고 있다.

 

티벳과 외몽골이 청나라 영토로 편입된 것은 청나라때였는데

 건륭제는 이러한 외교 관계를 위해 옹화궁을 라마사원으로 만든 것이다.

 

 

 

 

법륜전(法輪殿)

 

아쉽게도 내부는 촬영금지

여러 화려한 불상들과 볼거리가 많은데, 조폭처럼 생긴 스님들이 곳곳에 지켜서서 사실 위압감이 들 정도..

 

 

 

만복각(萬福閣)

 

옹화궁에서 제일 큰 전각으로 내부에 지상 18m, 지하8m로 총 26m의 크기의 미륵불이 있다.

하나의 통나무로 깍아 만든 것으로 티벳 라마 7세가 건륭제에게 바친 것이라고 하는데

그 크기 때문에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고 한다.

 

 

역시나 사진촬영 금지라서 아래 사진은 공개된 사진을 퍼왔다.

 

 

미륵불 Maitreya Buddha

 

사진은 작아서 실감이 안나지만

실제로 봤을 때 그 규모가 어마어마 해서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그리고

여기 만복각 앞쪽 전각에는 여러 희귀 불상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불교문화에 관심이 많다면 정말 볼거리 많으므로 꼭 이 곳 내부를 둘러보자.

사실, 전시관이 있는지도 몰라서 여기는 밖에서 사진만 찍고 그냥 스쳐 지나갈 뻔.

역시 내부는 사진촬영금지라 안에 전시된 불상을 찍지는 못했다.

 

 

 

 

다시 돌아나오면서 찍은 비정(碑亭)

 

 

비정의 내부 모습

이 돈 줏어가고 싶은 충동이..ㅋ

 

 

 

사천왕상이 있는 옹화문

 

 

 

옹화문 앞의 사자상

 

요 사자는 암컷이다..우찌 아냐고?

밑에 새끼가 있어서 그렇다고 한다.

뒤쪽 수컷은 새끼가 아닌 구슬처럼 생긴 것을 갖고 있었다.

 

 

 

 

옹화궁 지도

 

이든의 배낭기 EDEN @  WILSHIRE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