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ia/Japan

오사카성 도요토미 히데요리 자결터

Eden Choi 2014. 3. 20. 23:14

 

 

오사카성 천수각

 

 

 

 

 

천수각의 뒤쪽으로 난 길을 내려가면

오사카성을 축조할 때 돌을 제공했던 다이묘들의 가문과 부호를 나타낸 각인석을 볼 수 있다.

 

 

 

 

 

 

각인석(刻印石)

 

 

 

 

 

 

 

 

 

그리고 이 각인석 광장에서 맞으편을 보면 조그만 비석을 하나 볼 수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요도도노 모자 자결터

 

 

오사카성은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가 축성한 성으로

그의 통치 시대에는 일본정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사카성에서 57세에 얻은 자식이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이다.

그러나 5년 뒤에 히데요리가 아직 어린 나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사망하기 때문에, 

후에 에도막부시대를 열게 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국의 주도권을 잡게 된다.

이에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하고, 이로 인해 히데요리는 그 권한이 오사카 주변만으로 축소되는 다이묘로 전락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세력을 무시할 수는 없었기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자신의 손녀딸인 센히메를 히데요리와 결혼시키는 등

어느정도 대등한 권력구도를 보이며 일본은 2개의 정권이 공존하는 형태가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

전국무쌍 캐릭터로 나온 히데요리의 모습

 

 

 

 

 

 

그러나 공존하는 권력이 오래갈리는 없는 법, 히데요리가 성인이 되면서 결국 오사카 전투가 발발한다.

 

 

오사카 겨울 전투

 

전쟁 초반에 도쿠가와군에게 연패한 도요토미군은 오사카성에서 계속 전쟁을 지속한다.

도쿠가와는 10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오사카성을 공격하지만 난공불락의 오사카성은 함락되지 않는다.

이렇게 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화친을 제의한다.

화친의 조건은 히데요리의 지위는 계속 유지하되, 오사카성 해자를 매립한다는 것이었다.

히데요리는 이 화친에 반대했으나, 어머니 요도도노등의 설득으로 바깥 해자만 메운다는 조건으로 화친하게 된다.

 

(아니~ 해자가 있어서 오사카성이 철옹성이었는데, 그 해자를 메운다면?)

 

 

오사카 여름 전투

 

바깥쪽 해자만 메우기로 했지만, 도쿠가와는 안쪽 해자까지 다 메워버리고, 당근 히데요리는 다시 해자 파고..

결국 화친은 깨지고 또 다시 전투가 시작된다.

도요토미군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사카에 포진한 때를 노려 최종결전을 시도한다.

1615년 5월 7일 오사카 전투에서 마지막이 되는 덴노지,오카야마 전투(天王寺・岡山の戦い)가 발발한다.

도요토미군의 사나다 노부시게는 도쿠가와군을 무너뜨려 한 때 이에야스가 자결을 각오할 정도로 도쿠가와군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특히, 사나다 노부시게는 양쪽 모두에서 '일본 제일의 용사(日本一の兵)'로 칭송받았을 만큼 장렬한 돌진을 감행하며 분투하였다.

그러나 이에야스를 죽이지 못하고, 전사하는 바람에 도요토미군은 이후 승기를 잡지 못했다.

 

마침내, 도쿠가와군이 오사카성 안으로 진입하자 히데요리와 그어 어머니 요도도노는 이 곳에서 자결하고,

이로서 도요토미 가문은 멸한다.

 

이후 일본의 정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근거지인 에도(지금의 도쿄)로 넘어가며,

1869년 메이지 일왕이 도쿄로 천도하면서 천년간 지속된 수도로서의 교토의 지위도 끝이 난다.

 

 

에도성 황거에 들어가다

 

 

 

 

 

 

 

 

 

 

 

 

 

 

 

혼자서 사진을 찍고 있으니깐 한 외국인이 내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먼저 말을 건다.

오~ 쌩유쌩유..

다 좋은데, 혼자서 다니면 내 사진 찍어줄 사람이 없다는게 좀 아숩!!

 

 

 

 

까마귀인가? 여하튼 얘들이 무섭게 오사카성 해자를 둘러싸고 있다.

 

 

 

 

 

이든의 배낭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