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ia/South Korea

'싸워서 죽기는 쉬우나 길을 내주기는 어렵다' 부산 충렬사

Eden Choi 2014. 5. 24. 16:37

 

 

충렬사(忠烈祠)

 

 

 

부산 지하철 4호선 충렬사역에 내려서 나오면 충렬사가 보인다.

 

 

 

 

 

 

 

충렬사라고 하면 충무공 이순신을 모신 통영의 충렬사가 떠오를 수 있지만

부산에 위치한 충렬사는 임진왜란 당시 동래부사였던 송상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당이 그 기원이다.

 

 

 

 

충렬사 입구

 

 

 

 

충렬사 안내도

 

 

 

 

충렬사 안내문

 

 

 

 

 

충렬사 본전으로 바로 질러 가도 되지만 난 옆의 산책길을 이용해서 올라갔다.

 

 

 

 

 

 

충렬사 본전

 

 

 

본전 내부

 

충렬사의 시초는

선조 38년(1605) 동래부사 윤훤(尹暄)이 동래읍성의 남문 안에다 충렬공 송상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송공사단(宋公祠壇)을 세운 것이었다.

이 후 효종3년(1652), 동래부사 윤문거(尹文擧)가 성내의 충렬사(忠烈祠) 사우의 위치가 적합지 않다고 하여

현재 부산 안락동 지역으로 옮기고, 그 형태는 서원의 형태를 따랐기 때문에 안락서원(安樂書院)으로 불렀다.

하지만 안락서원은 1976년부터 1978년까지 부산시의 충렬사 성역화사업으로 인해

안락서원 건물을 허물어 버리고 콘크리트로 지금의 충렬사 형태로 다시 지었다.

그때는 문화재의 복원보다는 그냥 허물고 무조건 콘크리트 ㅠㅠ

 

현재 충렬사에는 배향위가 늘어 모두 93위의 신위를 모시고 있다고 한다.

 

 

 

 

 

충렬사에서 바라본 부산 안락동

 

 

 

 

본전에서 내려오면 소줄당이 보인다.

 

 

 

소줄당(昭崒堂)

 

처음엔 이건물이 무엇인지 몰랐으나 나중에 기념관에 들러 충렬사에 대한 안내를 받으면서 알게 되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충렬사의 전신은 안락서원이었고, 그 안락서원의 교육도장으로 사용되던 건물이었다.

 

 

 

 

소줄당

 

 

그리고 소줄당 맞은편에는 의열각이 있다.

 

 

의열각(義烈閣)

 

이 의열각에는 임진왜란 당시 순국하신 열녀 2분과 의녀 2분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아래 기념관에서 듣게 되었다.

 

 

 

 

다시 한 계단 내려가면 기념관이 있는데, 충렬사에 방문하면 이 기념관에 꼭 들리라고 권하고 싶다.

내부에는 임진왜란 당시의 모습을 알 수 있는 그림들이 소장되어 있는데, 안내하시는 분이 계셔서 충렬사의 여러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다.

난 혼자 갔는데도 정말 열심히 설명을 해주셨다.

 

앞에서 언급한 안락서원과 의열각 등은 모두 안내 하시는 분의 설명으로 알 수 있었다.

 

 

내부는 촬영금지라서 아래 순절도는 위키피디아에서 발췌했다.

 

 

 

동래부순절도

 

역시 그림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해주셨는데, 임진왜란 당시 동래읍성의 모습과 왜적이 쳐들어오는 모습을 그렸다.

가운데 빨간색 관복을 입고 있는 분이 동래부사 송상현공이다.

 

왜적이 동래읍성 앞에 목패를 세워 다음과 같이 전하자

 

戰則戰矣 不戰則假道(전즉전의 부전즉가도)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으면 길을 내어 달라!'

 

동래부사 송상현은 다음과 같이 적힌 목패를 던져 항전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戰死易 假道難(전사이 가도난)

'싸워서 죽기는 쉬우나 길을 내어 주기는 어렵다'

 

하지만 워낙 수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에 왜적을 감당할 수 없었고, 결국 왜병에게 피살되었다.

이때 그의 첩인 김섬도 그를 따라 순절함으로서 앞에서 말한 의열각에 신위가 모셔지게 되었다고 한다.

아니 본부인은 어디가고 왜 첩만 죽었나고 물어봤는데,

당시 동래부사는 중앙정부에서 파견시켰기 때문에 송상현공의 본가는 청주라고 한다.

따라서 본부인은 청주에 자식들과 머물며 본가를 지켰고, 시중을 들기 위해 첩만 따라왔다고 한다.

 

또한 또다른 첩이었던 이양녀에 대한 이야기도 듣게 되었는데
아직 어린 나이의 그녀는 동래성 전투에서 왜적들이 사로잡아 범하려 하자 오히려 그들을 나무랬다고 한다.

왜인들이 이에 절부로 칭찬하고, 일본으로 끌고 갔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녀의 절개를 높이 삼아 일본인 부녀들의 스승으로 삼아 풍기를 지도하게 했다고 한다.

그 일본인 부녀중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처도 있었는데,

이 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조선과 화해하는데 그 처가 큰 조력을 하였다고 한다.

그녀는 다행히 살아서 고국으로 송환되었는데, 남은 생은 송상현 부사의 본가로 돌아가 살았다고 한다.

그녀는 순절을 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의열각에는 신위가 없다.

그외 의녀 두분은 위 동래성 전투에서 왜군이 침입하자 지붕위의 기왓장을 던져 싸우다 돌아가신 마을 아낙네 2분이라고 한다.

 

의열각에 모셔진 4분의 신위 중 마지막 한명은

 

 

부산진 전투 전황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제일 발생한 전투가 바로 여기 부산진이라고 한다.

당시 이곳을 지키던 분이 정발 장군이었다.

하지만 당시 왜군의 막강한 군사력에 뻔히 죽음이 눈에 보이는 전투임에도 끝까지 싸웠고, 결국 왜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때 정발장군의 첩이었던 애향도 함께 자결함으로써 그녀의 신위를 의열각에 모시게 되었다.

당시 부산진성 안의 군민들도 끝까지 싸웠는데, 그 결과 군민 3,000명이 모두 학살을 당했다고 한다.

 

 

정말 이야기를 듣다 보면 임진왜란 초기의 부산 동래는 그냥 한마디로 게임이 안되는 싸움이었다.

그런데도 끝까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순국선열들의 모습에 숙연해진다.

 

하지만

 

부산에 '수영'이라는 지명이 있다.

이는 조선시대에 이곳에 경상좌수영이 있었고, 정확하게는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에서 '수'자와 '영'자를 따서 '수영'이라는 지명이 생겨났다.

그런데 위에서 정발장군이 싸운 부산진성 외에 부산 지역 여러 성들의 본부에 해당하는 곳이 이 경상좌수영이라고 하는데,

그 최고 책임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망을 가고, 마을 주민들이 농기구를 들고 왜적과 싸웠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여하튼 몰랐던 이러한 상세한 이야기를 기념관에서 듣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부산에 살지만 충렬사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던게 너무 많은 것 같다.

 

 

 

 

 

 

 

충렬사 입구에 연못이 있길래 잠시 쉬어간다.

 

 

 

 

임진왜란의 장본인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자결터

 

 

 

 

이든의 배낭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