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리야 사자의 문
시기리야 사자의 문 상상 복원도
지금은 사자의 발 부분만 남아있지만 시기리야 건설 당시에는 저런 모습으로 시기리야의 입구를 만들었다고 한다.
'시기리야'라는 이름도
사자라는 뜻의 '싱하'와 목구멍이라는 뜻의 '기리야'가 합쳐져 만든 단어이다.
즉, 저 사자의 목구멍이 바위 정상에 있는 왕궁에 도달하는 유일한 통로인 것이다.
사자의 발
이쯤 되면 왜 이 험난한 바위 꼭대기에 왕궁을 짓게 되었는지 궁금해지는데..
스리랑카 섬에는 이미 기원전에 아누라다푸라 지역에 최초의 왕국이 들어선다.
그리고 이 아누라다푸라 왕국(377 BC-1017AD)은 무려 천년 이상 지속되는데,
스리랑카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왕국이었고, 이 후로도 아누라다푸라 만큼 스리랑카에서 강력한 왕국은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아누라다푸라 왕국이 하나의 왕조로만 이어져 온 것은 아닌데
서기 455년 다투세나가 왕위에 오르면서 모리야 왕조가 개창한다.
다투세나에게는 왕이 되기 전 결혼한 평민 여인에게서 카샤파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다투세나가 왕조를 개창하면서 전략적으로 이전 왕족 출신의 딸을 왕비로 맞아드리게 된다.
그리고 그 왕비에게서도 새로운 아들을 얻게 되는데 모갈러나였다.
아..이렇게 되니 조강지처의 아들과 왕비의 아들
이 두 아들이 성장하면서 왕위계승권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되는 것은 필연적인 수순이었다.
카샤파는 장남이었지만 왕비의 자식의 아니라서 결국 후계자 자리는 모갈러나에게 넘어간다.
그러나 벗뜨 하우에버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샤파는 순순히 왕위 계승권을 동생에게 주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쿠테타를 일으켜 아버지를 생매장(?) 시키고, 왕위를 찬탈한다.
그리고 이때 동생까지 아작을 내었으면 되었을텐데 그럴 여력이 없었나 보다. 동생인 모갈러나는 남인도로 피신을 한다.
이에 동생이 다시 군사적으로 쳐들어올 것을 두려워 나머지
수도를 아누라다푸라에서 지금의 시기리야로 옮기게 된다.
그리고 동생이 쳐들어와도 굳건히 지킬 수 있는 곳에 왕궁을 짓기 시작한다.
무려 십년에 걸쳐서 이 바위 꼭대기에 왕궁을 건설하지만 카샤파가 이 왕궁에서 평온한 나날을 보낸 것은 얼마되지 않는다.
왕궁이 완성되고 얼마되지 않아서 우려했던 대로 동생이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왔기 때문이다.
이에 카샤파도 군대를 이끌고 나가 싸웠지만 전투에서 패배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근데 바위 꼭대기에 힘들게 왕궁을 만들었으면 그냥 방어만 해도 될텐테 왜 굳이 나가서 싸웠을까?
그러자고 10년에 걸쳐서 바위 위에 왕궁 만든 것 아님?)
어쨌든, 시기리야는 그렇게 카샤파왕이 죽음으로써 다시 정글 속에 묻혀버린다.
그리고 또 천년도 훨씬 더 지나 19세기 한 영국인에 의해서 발견되어 세상에 드러난다.
자..그럼 나도 사자의 입으로 들어가본다.
음..올라가다 아래를 보니 살짝쿵 무섭다.
이 다리 튼튼한 것 맞죠?
누가 여기다가 신발을 버리고 갔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거지?
시기리야 바위 딱 하나만 달랑 있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건너편에 다른 바위산이 하나 더 있었다.
여유가 있으면 저 바위산에 가서 시기리야 쪽을 바라보는 풍경도 멋있을 것 같은데..
시간적 여유는 있는데 체력이 없다. ㅋ
드디어 시기리야 바위 정상에 올랐다.
한때는 이곳에 화려했던 궁전이 있었을테지만 천년도 더 된 세월에 지금은 이렇게 그 터만 남았다.
바위 꼭대기에는 이렇게 거대한 수영장도 있다.
아님 식수를 위한 저수지 용도인가?
베키도 신기한지 열심히 사진찍는다.
난 그런 베키를 열심히 찍고^^
내가 본인 사진 찍는 것을 발견하고는 멋쩍은 웃음을 날린다. ㅎㅎ
내 생각에 저 자리에다 매점 하나 만들면 정말 장사는 잘 될 듯 싶은데..
올라오는 길이 꽤 되는데, 중간에 물 마실 곳도 없다.
물론 유적지 보호를 위해서 매점이 없는게 맞겠지만, 이왕 저렇게 지어놓았으면 활용을 잘 하자는게 내 생각
바위 절벽에도 뭔가 굴을 파놓았다.
가볼까?
애고..그런데 이 절벽까지 낙서가..
그나마 여기서 한글이 안보여서 다행이다.
아래를 내려다 보니 후달달 한다.
정상의 쓰레기나 물품은 여기서 처리되는 듯..
저 밑에서 이렇게 물건이 수송되고 있다.
왕의 자리
바위를 깎아 만든 왕좌이다.
이제 다시 내려간다.
올라올 때 보다 더 무섭다. ㅠ
입구에 불을 피워 놓았지만, 스리랑카에서 불 피워놓은 것 자주 보는 일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난 사진 찍는데 정신이 팔렸는데,
알고보니 말벌들이 기승을 부려서 쫒는다고 저렇게 해놓은 것이었다.
난 그것도 모르고 사자입구에 사람들 없는 지금이 기회다 싶어서 사진만 냅다 찍고 있었다.
고맙게도 그런 나를 보고 주변 사람들이 벌있다고 알려줘서 재빨리 피신을 했는데, 진짜 큰일 날뻘
요 며칠 계속 말벌이 기승을 부려 여기까지 와서 정상에 못올라간 여행객들도 있었다고 한다.
사실 왕궁은 바위산 꼭대기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바위 아래에 더 넓은 유적이 존재해 있지만 대부분 터만 남은게 아쉬울 뿐이다.
바위가 코브라 닮았다고 하는 것 같은데? 그래 보여요?
어쨌든 그렇게 시기리야 정상에 올랐다가 다시 내려왔다.
중국인 관광객을 단체로 실어 나른 관광버스가 여러대 주차해 있지만
우리를 기다리는 관광버스는 없으니 그냥 걷는다.
걷다가 지나가는 버스를 잡아타기로..
역시나 뚝뚝 기사가 접근해 온다.
담불라까지 1,500 루피를 달라고 한다.
아니 아침에 3명이서 650루피 주고 왔다고 하니깐 정말 어디 그런 뻥을 치느냐 하는 식으로 놀라면서
그럼 1,000루피까지 깎아주겠다고 한다.
아니..아침에 650 루피 주고 왔다니깐요 아저씨!! 아니 총각(20대로 보이고 말은 뺀질나게 잘했음 ㅋ)
하지만 몸도 피곤하고, 또 황금사원까지 가야하니깐 1인당 300루피씩 900루피에 가자고 흥정을 했다.
근데 이 아저씨 택도 없는 소리라며 눈이 엄청나게 커져서는 1,000루피 이하로는 절대 네버 안 된다고 한다.
음..그래?
알았어요! 그럼 우리 버스 타고 갈께요..빠빠이 짜이찌엔!!
ㅋㅋ
이러고 돌아서자 마자 이 아저씨 900루피에 가자고 금새 말을 바꾼다.
근데 이미 기분은 살짝 상한 상태, 싫다고 그냥 버스 타고 갈 것이라고 하고 거절을 했다.
그때 이 뚝뚝 기사 얼굴 표정을 봤어야 하는데..다 잡은 고기 놓친 그 허탈함에 오히려 불쌍해 보일 정도..
그렇게 버스를 타기 위해 다시 걷기 시작하는데,
우리의 흥정을 아까부터 지켜보던 다른 뚝뚝이 기사가 살며시 다가오더니
800루피에 자기는 가겠다고 한다. ㅋㅋ
그래서 우리도 오케이
이제 다음은 담불라 황금사원으로 간다.
이든의 배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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