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최초의 태후
선태후(宣太后) 미월(芈月)
진시황릉의 병마용은 그녀를 위한 것인가?
미월(芈月)
미월은 중국 역사상 최초로 태후라는 칭호를 쓴 여인이다.
사진은 중드 미월전에서 캡처
미월은 그녀의 아들 '영직'이 진나라의 왕위에 오른 기원전 306년부터 섭정을 하여 무려 36년간이나 권력을 휘둘렀다.
그녀 이전에는 중국 역사에서 '태후'라는 칭호는 없었고 선왕의 시호를 따서 무슨무슨 '후'라고만 불렀다.
그녀가 섭정을 하게 되면서부터 '태후'라는 칭호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중국 역사에서 태후라는 칭호는 청나라가 망할 때까지 사용되었다.
전국칠웅
그녀가 죽었을 무렵의 중국 전국 칠웅의 지도이다.
미월은 초나라 출신으로 진나라 혜문왕의 후궁이 되어 아들 영직을 낳았다(성이 영, 이름이 직)
혜문왕 사후 태자였던 영탕이 왕위를 이었지만
힘자랑 한다고 구정(하나라 때 만든 9개의 청동솥으로 왕위를 상징)을 들다가 허리가 삐끗해 재위 4년 만에 죽는다. 이 무슨 X죽음!
그래도 그 바람에 미월의 아들 영직이 진나라의 왕위에 오를 수 있게 되었고,
어린 아들을 대신해 그녀가 섭정을 하면서 천하통일의 기틀은 만들었다.
그리고 기원전 246년 그녀의 고손자이자 후에 진시황제가 되는 영정이 진나라 왕위에 오른다.
춘신군 황헐(春申君 黃歇)
재미있게도 황헐 역을 맡은 중국 배우의 이름은 황헌
중국 드라마 미월전에서는 미월의 첫사랑으로 나오지만 실제 역사에서 미월은 황헐에게 할머니뻘이었다.
첫사랑이었음에도 미월에게 2번이나 배신당하는 남주인공 역할이라 후반부에는 잘 나오지는 않는데
드라마 마지막회에서 황헐의 젊은 시절과 닮은 위추부라는 인물로 재등장한다.
위추부는 실제 역사에 존재하는 인물로 그녀의 남첩이었다.
게다가 그녀가 죽을 때가 되자 순장될 뻔한 인물이다. 헉!!
하지만
선태후 미월은 자의인지 타의인지 몰라도 순장 대신 병마용을 만들어 사람 대신 묻는 순총을 하기로 하는데..
서안 병마용에서 발굴된 병사의 모습
사진의 상투머리 모양을 잘 보자!
한쪽으로 기울여져 있는 상투머리는 진나라가 아닌 초나라의 상투 모양이다.
이에 근거해 앞에 초나라 사람인 황헐의 모습도 상투가 비스듬하게 되어 있다.
선태후 또한 초나라 출신으로 여산(진시황릉이 있는 곳)에 처음으로 무덤을 쓴 여인이다.
그녀는 서안 동쪽에 위치한 여산에 역대 진나라 왕들의 무덤을 쓰고자 했고 남편의 무덤까지 이장해 온다.
그렇기 때문에 병마용을 처음 쓴 여인은 선태후였다.
따라서 중국의 진경원이라는 학자는
병마용은 진시황이 아니라 선태후 미월의 능을 지키는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진나라가 아니라 초나라 양식의 병마용
또한 그는 이 병마용들이 초나라 출신인 선태후를 위해 초나라로 운구하는 행렬이라고도 주장을 했다.
병마용 제1호갱의 모습
그가 제시하는 주장을 좀 더 살펴보면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하고 제일 먼저 한 것이 모든 것을 진나라의 것으로 통일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병사의 모습에서 진나라 군인뿐만 아니라
상투를 비스듬히 한 초나라 병사의 모습이 더 많이 보인다는 것이다.
실제 병마용은 이렇게 채색이 되어 있었다.
진나라 병사가 아니라는 또 다른 이유로
진나라는 시황제가 통일 후 도량형을 통일시키면서 옷 색깔까지도 흑색으로 통일했는데
병마용을 보면 빨갛고 파랗게 채색된 옷을 입은 병사들이 나온다.
병마용 발굴 당시 사진
빨간색으로 채색된 병사를 볼 수 있다.
병마용 박물관에서 찍은 진시황릉의 모습과 병마용의 위치
진시황릉과 병마용의 위치
중국은 예로부터 방위을 중요시 했다. 지금도 동서남북 각각에 의미를 두는데
병마용은 진시황릉에서 1.5km 이상 떨어진 상당히 먼 거리에 그것도 동쪽 방향에서만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황릉의 동서남북 모두에 병마용이 있을 것이라 하여 발굴조사를 했지만 아직 발견된 것은 없다.
게다가 병마용은 그 넓은 진시황릉의 능역 바깥에 있다.
그 엄청난 넓이의 무덤 영역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병마용을 만들지 않고 이렇게 먼 곳에 만들었다는 것은 확실히 의문이 든다.
또한 병마용 주변에는 진시황릉보다 더 가까운 곳에 대규모의 고분이 2기나 더 있다.
한양릉 능역 모형도
한양릉은 진시황 사후 약 80년뒤 만들어진 한나라 제6대 황제 경제의 황릉이다.
이곳도 직접 갔다왔는데 이곳을 언급하는 이유는 여기서도 병마용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곳 한양릉의 병마용은 저 가운데 황릉을 둘러싸고 사방으로 병마용이 나왔다.
한양릉 확대한 사진
홈처럼 파여져 있는 것이 병마용갱의 위치로 피라밋 형태의 무덤을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다.
한양릉의 병마용
진시황릉의 병마용보다 약 1/3 크기로 작다.
또 수레 바퀴의 크기도 문제를 제기한다.
천하를 통일했던 시황제는
진나라 영토 내에서 '차동궤(車同軌)' 바퀴가 아니면 통행 자체가 불가능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시황제의 명을 어기고 다양한 형태의 수레바퀴가 병마용에서 발굴되는 것 또한 의문이라는 것이다.
즉, 이 모든 것은 진시황 이전이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외에 병마용의 군진이 진시황제가 전투를 벌이던 당시와는 차이가 난다는 의견도 있다.
제3병마용갱에는 전차를 중심으로 병사들이 사열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중국 기록인 사기, 문헌통보, 회남자 등의 사료를 보면
진시황 시대에는 주로 기병을 활용하였다고 나오며 전차를 이용한 차전의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병마용의 군진 또한 진시황 이전의 것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참고로 미월전에도 이 내용을 의식했는지 모르겠지만 미월이 이제는 전차를 이용한 전투가 아니라
기병을 이용한 전투로 양상이 바뀐다고 하면서
기마민족인 의거국 왕 적려의 도움을 받아 기마병을 양성한다.
역사 기록에는 미월이 이 의거국 왕과 사통을 하여 아이를 둘씩이나 낳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미월전에서는 한 명만 나온다.
이 외에도 몇 가지 더 뒷받침 하는 주장이 있지만 사진과 함께 설명하려니 이 정도에서 마무리해야겠다.
어쨌거나
지금까지 내용은 중국학자의 주장일 뿐이며, 중국 정부는 진시황의 병마용으로 못 박고 있다.
단지 중드 미월전을 보면서 든 의문에 이렇게 지난 여행기 사진을 들추며
병마용이 그녀를 위한 것이 아닐까라는 조심스런 의문을 가져 본다.
추가 내용
병마용에 새겨진 글자는 한 글자의 지라 비(脾)가 아니라 미월(芈月)을 나타내는 두 글자라는 주장도 있다.
미(芈)자는 초나라 성씨로서 거의 사용되지 않는 글자라 비(脾)자와 헷갈렸다는 것이다.
중국 한자는 오른쪽부터 쓰니 '비(脾)'가 아니라 '미월(月芈)' 두 글자로 볼 수도 있겠다.
또 하나의 병마용 나의 한양릉 여행기
http://blog.daum.net/mickeyeden/16155933
이든의 배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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