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ia/China

낙양 용문석굴(뤄양 롱먼스쿠)에서 만난 중국 친구^^

Eden Choi 2016. 12. 22. 04:26



드디어 낙양(뤄양)에 도착했다.


중국의 역사를 볼려면 서안과 더불어 꼭 봐야할 곳 낙양

낙양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처음 찾아간 곳은 바로 용문석굴!! 그런데 시작부터 고생길이 열리는데..ㅠㅠ




용문석굴은 낙양시에서 꽤 먼거리에 있지만 다행히 시내버스가 운행 중이다.

낙양호스텔에서는 53번 버스가 용문석굴까지 운행한다.


낙양의 시내버스 요금은 에어콘 있는 버스는 1.5위엔 없는 것은 1위엔

아..그런데 나 몰라서 에어콘 있는 버스도 1위엔 내고 다녔다. 기사가 아무말 안 해서 난 1위엔인줄 알았는데

호스텔 직원이 1.5위엔이라고..


여하튼 용문석굴이 종점이라 여기까지 찾아오는 것은 어렵지 않았는데..그런데..





용문석굴 입구로 가는 길이 공사 중이라 길이 막혔다. 그래서 반대쪽으로 돌아서 가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한 아저씨가 계속 날 따라 오면서 뭐라고 한다.


대충 느낌에 멀어서 못 간다. 자기가 태워주겠다..뭐 이런 느낌인데..

내가 속을까봐? 그래놓고 돈 달라고 하겠지.

그래서 '부야오' 외치고 당당히 위 사진의 길을 걸어서 갔다.


그런데 가도 가도 끝이 없다. 용문석굴은 커녕 지도를 보니 오히려 내가 반대쪽으로 가고 있다.

할 수 없이 경찰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길래 물어보니 길은 맞다고 한다. 그런데 길은 맞는데 자꾸 뭐라고 한다.

뭐야? 말이 안 통하니 알 수가 있나..


그리고 한참 뒤에야 이 사람들이 나에게 뭘 말할려고 하는지 알았다.


용문석굴 입구가 공사 중이라 출구쪽으로 돌아서 들어가야 하는데..그 길이 엄청나게 멀었던 것이다.

여긴 중국이닷! 우리나라처럼 관광지 입구와 출구가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

무려 3 km 이상 돌아서 가야 하는 길이었다. 헉헉




빨간색이 내가 간 길이다.

매표소로 가는 길이 막혀서 반대로 몇 Km 아래로 가서 다리를 건너 다시 출구 쪽으로 돌아와야 하는 길이었다.


물론 이때만 해도 이런 줄 몰랐고, 지금 갔다 와서 보니 내가 저렇게 갔다는 것을 알겠는데..

그래도 그렇게 무작정 걷다 보니 오토바이를 개조한 차량이 호객행위를 한다.

나도 이렇게 걸을 수는 없겠다 싶어서 한참 고민한 끝에 20위엔에 흥정을 하고 탔다.


물론 타고 나니 얼마 안가서 출구에 도착 ㅠㅠ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타고 올 걸..


게다가 나중에 숙소 돌아가서 알게 되었는데, 여길 갔던 다른 친구는 마침 셔틀버스가 있어서 공짜로 타고 갔다고 한다.

앗!! 무료 셔틀버스가 있었어?

그런데 베이징에서 온 중국 친구는 40위엔이나 주고 탔다고 한다.

앗!! 뭐야..같은 중국인도 사기를 당했나? 여하튼 난 20위엔 주고 왔으니 중간은 했다. ㅋ



이수(伊水)

용문석굴을 가로지르는 강이다.


잠시 출구로 바로 왔으니 표 사지 말고 출구로 들어가 볼까?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출구에는 사람이 지키고 서서 용문석굴로 못 들어가게 했다.

그럼 그렇지! 중국이 돈 버는 일에 틈이 있을리 없다.



할 수 없이 저 다리를 건너서 다시 매표소쪽으로 향한다.

아이고..정말 중국이란 나라는 크다!! 여기서 매표소까지도 한 1Km 넘게 걸은 것 같다.



드디어 매표소 도착


길이 안 막혔다면 버스 종점에서 여기까지 바로 걸어오면 되는데, 지금 몇 km를 돌아서 온 거야? ㅠㅠ


 



입장료 100위엔(약 18,000원)

다른 관광지는 200위엔이 넘는 곳도 많으니 100위엔이면 싼 것인가?




용문


원래 이곳은 이수가 흐르는 곳이라 이궐이라고 불렸다고 하는데

수양제가 서안과 더불어 낙양도 수도로 삼으면서 이곳을 용문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향산사



자!! 이제부터 석굴 탐사


낙양의 용문석굴은 돈황의 막고굴, 대동의 운강석굴과 더불어 중국 3대 석굴 중 하나이다.


중국 남북조 시대의 북위 효문제가 대동에서 여기 낙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석굴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대동의 운강석굴과 낙양의 용문석굴은 북위에서 이어서 만든 것이다.

하지만 용문석굴은 이후 송나라시대까지 몇 백년에 이어 석굴이 조성되었고

특히 당나라 측천무후가 장안에서 수도를 다시 낙양으로 옮기면서 봉선사동을 조성하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맞는다.


 











얼굴이 짤렸네?


여기가 아마 연화동이었던 것 같은데..이곳을 지나고 나면 드디어 봉선사동이 나온다


용문석굴이 여러 나라를 걸쳐 오랜 기간 조성되었다고 해도

석굴이 번성했던 북위시대와 후에 번영했던 당나라시대 석굴이 가장 대표적이라고 하는데

그 중에서도 당나라시대 봉선사동이 용문석굴 중 최고.


 



봉선사동


용문석굴에서 가장 규모도 크고 화려한 석굴이다.

특히 가운데 비로자나불은 당시 봉선사동 조성에 힘쓴 측천무후의 얼굴을 본떴다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측천무후가 용문석굴에 자금을 지원한 시기가 다르고

무측천은 비로자나불이 아니라 미륵불의 화신이라고 생각했기에 무측천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그래도 얼굴이 여자의 모습이라 난 측천무후에 한 표!




봉선사동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그런데 불교용어들은 전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에서 나왔기 때문에 모두 다 음역이다.

즉 한자의 의미가 아니라 소리만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


비로자나불은 산스크리트어 '마하 바이로차나(Mahāvairocana)'의 음역이며, 그 뜻은 하느님이다.

앞에 마하는 크다, 훌륭하다는 뜻으로 지금 인도와 동남아에서 사용되는 단어이다.

태국에서 대학교라는 단어는 '마하 위타얄라이'라고 한다.



미륵불은 현세는 아직 부처가 아닌 보살로 미륵은 산스크리어 '매트레야(Maitreya)'의 음역이다.

보살 역시 보리살타에서 나온 단어로 이 미륵보살이 후에 미륵불이 되어 세상을 구하러 온다고 한다.


사족으로

최순실이 농단한 미르재단과 K-스포츠를 합치면 미륵(미르 + K)이 된다고 한다. ㅋ 믿거나 말거나





봉선사동에서

이 사진을 부탁하면서 한 중국인에게 말을 걸게 되었다.




사진을 찍는 저 친구

저 친구도 혼자 왔길래 서로 사진을 부탁하다가 알게 되었다.


말이 안통하니 휴대폰 번역기를 써가며 대화를 나누었지만 짧은 시간인데도 금방 친해졌다.

뭐랄까? 한국에 대해서 굉장히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여기서부터는 함께 동행을 하게 되었다.







봉선사동에서 바라 본 이수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 서산석굴, 건너편은 동산석굴이다.





다리를 건너 이제 동산석굴로 향한다.






강을 건너 와 바라 본 서산석굴





동산석굴은 꽤 높은 곳에 위치

힘들지만 대신 보존 상태가 좋은 불상들이 많았다.








강 건너에서 바라 본 봉선사동





용문석굴을 다 보고 나갈 때쯤 되니 몇 km나 떨어진 버스정거장까지 돌아나가는 것이 슬슬 걱정이 된다.

그런데 이 친구가 차가 있다는 것이다.

오호!! 덕분에 편하게 버스 정거장까지 갈 수 있었다.

방향이 달라 낙양 시내까지 날 못 태워줘서 미안하다고 할 정도로 신경을 써 주었다.

우연히 만난 중국인이 베푼 도움에 무척이나 중국이 좋아졌다.

사실 이 친구뿐만 아니라 이번 여행에서 여러번 도움을 받았다. 중국이 점점 좋아지는 이유이다.



중국 사천성 여행기


이든의 배낭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