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Qing Dynasty Cixi Imperial Dowager Empress on Throne
서태후(西太后)
大淸國當今聖母皇太后萬歲萬歲萬萬歲!
대청국당금성모황태후만세만세만만세!
청나라 말기
함풍제에 이어 동치제, 광서제에 이르기까지, 황제의 권한을 넘어서 실질적으로 청나라를 통치했던 서태후.
비록 후궁이었지만, 함풍제 사후 그의 아들 동치제를 황위에 올림으로서, 황후와 더불어 황제의 생모로서 그녀 또한 태후가 된다.
황후는 자안(慈安)황태후, 그녀는 자희(慈禧)황태후라는 정식명칭이 있지만,
자안태후는 자금성의 동쪽에, 자희태후는 서쪽에 거처했다고 해서 그녀는 서태후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하다.
그녀와 함께 한 청나라의 운명
서태후가 죽기 하루 전날,
자금성 영대에 유폐되어 있던 광서제가 죽고, 갓 3살짜리 꼬맹이 광서제의 동생 순친왕의 아들을 다음 황위에 지목한다.
그가 바로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 부의이다.
하지만 얼마 못가서 쑨원의 중화민국이 들어섬으로서 청나라는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그녀의 장례행렬은 무려 1여년이나 걸려서 오늘 이곳 청동릉에 묻히게 된다.
청동릉 지도
입구에서 찍은 청동릉지도 사진인데, 지금 내가 찾아가는 곳은 바로 서태후의 무덤인 보타욕정동릉이다.
(사진에 빨간 표시한 곳)
청나라 황후의 무덤은 황제와 합장을 하였으나 몇몇 황후의 무덤은 따로 황제릉 옆에 조성되었는데,
청동릉에서 예를 들어 보면, 순치제의 효릉 오른쪽에 위치해서 효동릉
소릉의 서쪽에 위치해서 소서릉 이런식으로 이름이 부여되었다.
서태후는 황후가 아닌 귀비였었지만, 태후의 자리에 있었기에
함풍제의 정릉 동쪽에 정동릉을 조성하는데, 자안태후도 같은 정동릉에 묻혀 있어서
서태후는 보타욕 정동릉, 동태후는 보상욕 정동릉이라 칭한다.
하지만 살아생전 그들의 이름과는 달리, 서태후는 죽어서 동쪽에, 동태후는 죽어서 서쪽에 묻혀있다.(위 지도 참조)
이렇게 서로 바뀐 위치로 묻힌 이유가
동태후를 시기질투한 서태후가 동태후의 능묘를 차지했다는 설이 전해오지만,
어쨌든, 황후였던 동태후가 서열상 서태후보다 위였기 때문에
남편인 함풍제의 정릉과 가까운 서쪽에 묻혔다고 보는게 정설이다.
유릉에 전시되어 있던 정동릉 사진
동태후와 나란히 릉이 조성되어 있는데, 앞쪽이 서태후의 무덤으로 입구에서 보면 오른쪽에 위치한다.
아이들이 사생대회를 나왔는가 보다.
여기 서태후의 릉을 배경으로 다들 이렇게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근데, 이 아이들의 눈에 내가 더 생소하게 보이는듯..
혼자서 내가 왔다리 갔다리 하니깐 다들 흘낏흘낏 날 훔쳐보는게 느껴진다.
심지어 뚫어지게 쳐다보는 학생들도 몇 있었고..ㅋ
'이놈의 인기'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그건 아닌듯..ㅋㅋ
융은전(隆恩殿)
황제가 아니기에 능묘의 규모는 어쩔 수가 없었지만
그 내부는 보석으로 치장을 하고, 화려하게 장식을 해서 명, 청 시대를 통들어 가장 화려한 능을 조성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것이 도굴당하고 남은 것은 건물뿐이다.
그녀의 릉에는 이렇게 황제를 상징하는 용이 조각되어 있다.
서태후의 생전 모습
자..이제 그녀의 관이 안치되어 있는 지하궁으로 들어간다.
서태후의 관
국민혁명군에 귀순했던 손전영은 군비를 마련하느라 고심하던 중 청동릉을 도굴하기로 한다.
아무리 지하궁의 석문이 두껍고 여러겹으로 관곽을 씌워놨어도
폭탄까지 이용한 손전영의 군대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다음은 손전영 부하의 진술이다.
“드디어 관 뚜껑이 열렸다. 곱게 늙은 한 여인이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그 여인은 비취로 만든 아홉 마리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구룡희주(九龍戱珠)가 새겨진 봉황 관을 쓰고 있었다.
발아래에는 옥과 비취로 만든 연꽃이 놓여 있었다. 봉황관 위에 쌓여있는 보주(寶珠)들은 불빛을 받아 영롱하게 빛을 발했다.
여인의 머리는 검은 색이었고, 광대뼈가 도드라졌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자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관을 열자 외부 공기가 유입되고 얼마 되지 않아,
그 아름다운 모습은 금방 사라지고 여인의 몸은 쏴하는 소리와 함께 푹 꺼져버리면서 얼굴빛도 새파래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서태후의 입에서는 묘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주먹 크기의 야광명주(夜光明珠)였다. 이 야광명주는 어두운 데서도 밝은 빛을 발하는 인광(燐光)과 형광(螢光)을 띠는 보물중의 보물이었다.
서태후는 야광명주를 힘껏 물고 있었다. 손전영의 부하가 대검으로 서태후의 입을 찢어 열고 야광명주를 손전영에게 건네주었다.
손전영은 황홀한 눈빛으로 야광명주를 받아들었다”
서태후의 수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데,
손전영의 부하들은 서태후를 감쌌던 용포는 물론 저고리와 바지, 신발, 버선까지 모조리 벗겨 갔으며,
혹시나 야명주가 더 있을까 싶어 서태후의 음부에까지 손을 넣고 훑기까지 했다고 한다.
사흘간에 걸친 대대적인 청동릉의 도굴로 손전영은 차량 30대 분량의 보물을 챙겨 사라졌다.
목관에서 발견된 서태후의 시신 출처: Wikipedia
지하궁 석문의 문고리 조각
서태후는 영원히 이 문이 열리지 않기를 바랬겠지만..
지하궁을 나오면서..
하이힐과 짧은 치마의 그녀가 왠지 이곳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서태후 망루에서 본 동태후의 무덤
망루에서 본 융은전
서태후 무덤의 봉분
이 물길을 사이로 왼쪽은 동태후인 자안태후, 오른쪽은 서태후 자희태후의 무덤이다.
이 길로 계속따라 가면 서태후의 남편인 함풍제의 정릉이 나온다.
여기까지 온 김에 정릉까지 가볼려고, 이런 숲길을 가로 질러 갔는데..
거의 폐허수준이네?
나중에 알고 봤더니 함풍제의 정릉이 아니라 후궁들의 무덤인 정비원침이다.
여긴 거의 관리가 안되어 있었고, 문도 잠겨져 있었다.
정릉을 보는 것은 포기하고
다음은 청나라 전성기를 연 강희제의 능묘인 경릉으로 이동했다.
To be continued
이든의 배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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